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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헤어짐보다 앞서라.
모든 것이 시작되는 거대한 심연을 생각하라.
가장 깊은 떨림을 주는 원천을 찾아라.

그러면 이 한 번뿐인 삶을 완전히 즐길 수 있을 테니.
  • 골든아워 4
    1. 외상외과는 의료계에서조차 뭔지 모르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 분야였다. 내가 이 일을 붙들고 있음으로써 나는 자신뿐만 아니라 주위의 많은 사람들을 힘들게 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에게 이 분야의 필요성에 대해서 말하고 다녀야만 하는 현실이 지독히 싫었다. 나의 가치는 늘 타인에 의해 결정되었고 내 위치는 상대와 맞물려 돌아갔다. 현실에 내가 머물 자리가 없는 것만 같았다. 그해 말 〈한겨레신문〉의 김기태 기자가 병원에 찾아왔다. 준수한 외모의 젊은 기자는 일주일간 날밤을 새우며 나와 함께 있었다. 처참하게 뭉그러진 환자들을 목겨한 그는 죽음에서조차 계층 차이가 존재한다며 한탄했다. 김기태가 내게 말했다. - 세상이 왜 이런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그를 한동안 응시하다 대답했다. - 원래 세상이 이런..
  • 골든아워 3
    1. - 아무리 수많은 사람이 노력하고 필요성을 알린다고 해도 국가 정책이 움질일 수 있는 파이는 정해져 있어요. 그게 현실이고 사실이죠. 민주 국가에서 정책을 집행할 때 다양한 안건이 수많은 사람들을 거쳐 진행됩니다. 그 과정에서 여러 일들이 발생하고요. 시급했던 정책들이 미뤄지다 폐기되기도 하고, 대규모 국책사업이 예산 낭비로 판명되는 경우도 있어요. 하지만 어떻게 합니까? 옳은 방향에 대한 각자의 생각이 다 다른걸요. 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제대로 된 중증외상센터가 없다고 나라가 망하지는 않는다. 대다수의 국민들은 그것 없이도 지금까지 잘 지내왔다. 중증외상 의료 시스템이 없어 죽어나가는 목숨보다 더 많은 목숨이 걸린 중대 사안은 많을 것이다. 그것들조차 잰걸음을 하다 고꾸라질 수도 있다. 민주..
  • 골든아워 2
    1. 남자는 순하게 웃었다. 덥수룩하게 자란 머리칼에 인상이 더 부드러워 보였다. 얼마 전까지 이 지역을 장악하던 폭력 조직의 일원이었다는 것이 연상되지 않았다. 남자는 대량의 피를 쏟아내며 지옥문을 넘었다가 돌아왔다. 부서진 몸에 제 피보다 모르는 사람의 피를 더 많이 받아 명줄을 유지했다. 수술 시 혈액은 필수적인데 피의 주요 세포 성분은 아직까지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신의 영역으로 남아 있다. 인공 핼액에 대한 수많은 연구는 답보 상태로, 의학의 정체구간이다. 결국 중증외상 환자는 수술 시 남의 피를 받아 넣어야만 한다. 물론 타인의 피는 짧으면 수일, 길어야 한 달이면 자신의 골수에서 만들어진 제 피로 갈음되지만, 거의 죽다 살아난 중증외상 환자들이 사고 전과 달리 좋은 방향으로 인성 변화를 보..
  • 골든아워 1
    1. 김훈 선생은 자신의 책을 두고 ‘세상의 모멸과 치욕을 살아 있는 몸으로 감당해내면서 이 알 수 없는 무의미와 끝까지 싸우는 한 사내의 운명에 관하여 말하고 싶었다. 희망을 말하지 않고, 희망을 세우지 않고, 가짜 희망에 기대지 않고, 희망 없는 세계를 희망 없이 돌파하는 그 사내의 슬픔과 고난 속에서 겸험되지 않은 새로운 희망의 싹이 돋아나기를 바랐다.’ 라고 했다. 내게 는 나의 이야기였고, 팀원들의 이야기였다. 그리고 힘든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2. 이제 나는 외과 의사의 삶이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 뼛속 깊이 느낀다. 그 무게는 환자를 살리고 회복시켰을 때 느끼는 만족감을 가볍게 뛰어넘는다. 터진 장기를 꿰매어 다시 붙여놓아도 내가 생사에 깊이 관여하는 것은 거기까지다. ..
  • 요즘 어른을 위한 최소한의 세계사 4
    "나는 잔혹한 사람이 아니다. 양심적으로 거리낄 게 없다." -폴 포트가 생전에 남긴 인터뷰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