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러스트 (채권-해럴드 배너. 둘)

1.

 

 헬렌은 머잖아 자신이 그저 아버지의 제자가 아니라 연구 대상이 되기도 했다는 걸 깨달았다. 아버지는 자기 교육의 구체적 결과에 관심을 두는 듯했고, 그런 교육이 딸의 정신과 도덕관념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추적했다. 아버지에게 검사를 받을 때면, 헬렌은 다른 누군가가 아버지의 눈 뒤에서 밖을 내다보고 있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헬렌은 이 모든 캐묻기 때문에 자신이 조용하고 젠체하지 않는 성격을 형성하게 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이런 성격은 헬렌이 부모와 부모의 친구들 곁에 있을 때 한 점 오류도 없이, 한결같이 연기해낸 배역이기도 했다 - 그녀는 소심하게 에의바르고, 최대한 말을 아꼈으며, 가능하면 고갯짓이나 단답형으로만 대답했다. 늘 사람들의 시선을 피했으며,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어른들과 함게 있으려 하지 않았다. 이런 페르소나를 한 번도 버린 적이 없던 그녀는 만년에 이르러 이 성격이 늘 자신의 진정한 모습이었는지, 아니면 세월이 지나면서 영혼이 가면에 맞추어진 것인지 궁금해졌다.

 

 

2.

 

 ... 학자나 신비주의자 중 일부는 헬렌의 성서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학업 성취, 다양한 밀교의 교리에 대한 유창성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브레보트 씨는 그들의 관심을 감지하고 뭔가 말하려 했지만, 상대방은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막거나 면담 내내 그를 무시했다. 교사 중 몇 명을 브레보트 씨에게 방에서 나가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그리고 일부는 교육적인 온기를 담아 헬렌의 다리를 움켜쥐었다가 그녀의 치명적인 수동성과 물러설 줄 모르고 노려보는 눈에 겁을 먹고 손을 치웠다.

 

 

3.

 

 헬렌은 취리히에서 부모 없이 지내던 그 시절에 토스카나에서 산책을 하던 중 처음 느꼈던 직관을 확인하게 되었다 - 어째서인지, 그녀는 외로움에 고양감을 느꼈다.

 

 

4.

 

 ... 하지만 헬렌은 브레보트 부인의 중매 작전에 반기를 들지는 않았어도, 마지못해 승낙함으로써 적극적인 역할을 하지는 않겠다는 점을 분명히 밝혔다. 몇몇 사람들이 토라진 걸 나타내는 행동이라고 오해했던 그녀의 다가가기 어려운 침묵과 많은 사람이 슬픔이라고 오해했던 지속적인 멍한 상태는 불복종의 수동적 형태가 아니라 지루함의 구현이었다. 그녀는 단지 어머니의 결혼 작전을 진행하는 데 필요한 의례적 인사말과 상투적 예의를 구사할 수 없었을 뿐이었다.

 

 

5.

 

 저택은 파티의 소음과 셸던이 해둔 번쩍번쩍한 장식으로부터 멀어질수록 달라져갔다. 헬렌은 질서정연하고 신중한 세상으로 들어갔다. 그곳의 침묵에는 침착한 자신감이 있었다. 마치 조금만 노력하면 침묵이 언제나 이길 수 있다는 걸 아는 듯했다. 공기에 배어있는 미약한 서늘함은 향기롭기도 했다. 헬렌이 인상적이라고 느낀건 네덜란드 유화나 프랑스식 샹들리에가 그리는 별자리, 모든 모퉁이마다 버섯처럼 피어나는 중국 도자기 같은 부유함의 뚜렷한 증거가 아니었다. 그녀는 보다 사소한 것에 감명받았다. 문고리, 어둑하고 우묵한 공간에 자연스럽게 녹아든 의자, 소파와 그 주변의 빈 공간. 그 모든 것이 존재감을 드러내며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그것들은 평범하기 짝이 없는 물건이었지만 진짜 물건이기도 했다. 쓰레기투성이 세상이 망가진 사본을 만들 때 참조한 진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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