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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헤어짐보다 앞서라.
모든 것이 시작되는 거대한 심연을 생각하라.
가장 깊은 떨림을 주는 원천을 찾아라.

그러면 이 한 번뿐인 삶을 완전히 즐길 수 있을 테니.
  • 노인과 바다 (제비갈매기)
    1. 도둑갈매기나 덩치가 크고 힘이 센 새들을 제외하면 새들이 사람보다 더 팍팍한 삶을 살고 있지, 라고 노인은 생각했다. 바다가 얼마나 잔인한데. 제비갈매기같이 여리고 조그만 새들은 왜 생겨났을까? 바다는 친절하고 무척 아름다워. 하지만 바다는 무척, 그리고 갑자기 잔인해질 수 있는 곳이어서 조그만 목소리를 내고 자맥질해가며 먹잇감을 찾아 날아다니는 새들은 바다에서 살기에는 너무 연약하게 창조됐지. 2. 노인은 바다를 늘 '라 마르(la mar)'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바다를 사랑스럽게 여길 때 부르는 스페인어다. 바다를 사랑스럽게 여기는 사람들이 가끔 바다에 대해 험한 말을 하는 경우도 있길 하지만 그럴 때조차도 사람들은 바다가 여자인 듯이 말했다. 젊은 어부들 가운데 한때 상어 간으로 큰돈을 벌어..
  • 노인과 바다 (있는 척 이야기했다.)
    "뭘 드실 거예요?" 소년이 물었다. "생선을 곁들인 노란 쌀밥이 한 냄비 있다. 너도 좀 먹을래?" "아니에요. 전 집에 가서 먹을래요. 불을 피울까요?" "아니다. 내가 나중에 피우마. 아니면 식은 밥 그대로 먹든지." "투망 좀 가져가도 돼요?" "물론이지." 사실 노인에게는 투망이 없었다. 소년은 그 투망을 언제 팔아 치웠는지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날마다 투망이 있는 척 이야기했다. 사실 생선을 곁들인 노란 쌀밥도 없었다. 소년은 이것 역시 알고 있었다.
  • 백조와 박쥐 (속이고 넘어갈 수만 있다면)
    하지만 구라키의 심리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었다. 무라마쓰의 얘기를 들었을 때, 하이타니라는 자에 대해서는 고다이도 심한 혐오감이 들었다. 아마도 구라키는 지독히 굴욕적인 일을 당했을 터였다. 욱해서 칼로 찔러버렸다, 라는 것도 어떤 면에서는 이해가 되었다. 문제는 그다음의 행동인데, 원래 선량하던 인간이라도 선뜻 자수하지 못한 채 이래저래 망설이는 건 일반적인 심리일 것이다. 조금만 더 시간이 주어졌다면 구라키도 자수하기로 결단을 내렸을지 모른다. 하지만 엉뚱한 사람이 체포되는 사태가 그의 심리에 큰 영향을 끼치고 말았다. 인간이란 약한 동물이다. 속이고 넘어갈 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다, 라는 건 부자연스럽다고 할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 관내분실 (누구보다도 선명하고 고유한 이름을 가지고,)
    스무 살의 엄마, 세계 한가운데에 있었을 엄마, 이야기의 화자이자 주인공이었을 엄마. 인덱스를 가진 엄마. 쏟아지는 조명 속에서 춤을 추고, 선과 선 사이에 존재하는, 이름과 목소리와 형상을 가진 엄마. 지민은 엄마를 생각했다. 엄마는 지민을 닮은 얼굴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녀도 아이를 가져서 두려웠을까. 그렇지만 사랑하겠다고 결심했을까. 그렇게 지민 엄마라는 이름을 얻은 엄마. 원래의 이름을 잃어버린 엄마. 세계 속에서 분실된 엄마. 그러나 한때는, 누구보다도 선명하고 고유한 이름을 가지고, 이 세계에 존재했을 김은하 씨. 지민은 본 적 없는 그녀의 과거를 이제야 상상할 수 있었다.
  •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 관내분실 (삶은 단절된 이후에도 여전히 삶일까.)
    지민은 다시 엄마를 떠올렸다. 지민은 엄마가 마인드 업로딩에 동의했다는 사실도 믿기 어려웠다. 정말로 지민이 기억하는 엄마라면, 그녀는 마인드조차 남기지 않고 완전히 사라지고 싶었을 것이다. 아무리 그것이 박제된 정신에 불과하다고 해도 말이다. 게다가 지민은 마인드에 대한 동생 유민의 의견에 동의하는 편이었다. 그것이 아무리 생전의 사람들을 잘 모방한다고 할지라도 그들을 또 다른 자아를 가진 진짜 정신으로 대하는 것은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엄마의 끊어진 인덱스와 생전의 엄마에 대해 생각할수록, 머릿속의 실타래가 엉켜갔다. 토론 프로그램은 이제 검은 화면으로 페이드아웃 되며 내레이터의 목소리만을 남겼다. "그래도 확실한 것은 있습니다. 마인드들은 우리가 생전에 맺었던 관계들, 우리가 공유했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