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든아워 2

1.

 

 남자는 순하게 웃었다. 덥수룩하게 자란 머리칼에 인상이 더 부드러워 보였다. 얼마 전까지 이 지역을 장악하던 폭력 조직의 일원이었다는 것이 연상되지 않았다. 남자는 대량의 피를 쏟아내며 지옥문을 넘었다가 돌아왔다. 부서진 몸에 제 피보다 모르는 사람의 피를 더 많이 받아 명줄을 유지했다.

 수술 시 혈액은 필수적인데 피의 주요 세포 성분은 아직까지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신의 영역으로 남아 있다. 인공 핼액에 대한 수많은 연구는 답보 상태로, 의학의 정체구간이다. 결국 중증외상 환자는 수술 시 남의 피를 받아 넣어야만 한다. 물론 타인의 피는 짧으면 수일, 길어야 한 달이면 자신의 골수에서 만들어진 제 피로 갈음되지만, 거의 죽다 살아난 중증외상 환자들이 사고 전과 달리 좋은 방향으로 인성 변화를 보일 때마다 나는 궁금했다. 선한 의지와 함께 기증된 선한 이들의 좋은 피가 수혈받는 사람에게 정서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인지.

 

 

 

2.

 

 그가 떠나려는 이유를 알고 싶었다. 정재호에게 저녁 식사를 청했다. 굳이 병원 밖으로 나가 고기를 굽고 맥주를 마셨다. 내가 어렵게 말을 꺼냈다.

- 그만두신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연수 다녀오신 지도 얼마 되지 않았는데 그 소문이 사실인가요?

 그는 대답 대신 반문했다.

- 국종아, 너는 의과대학 교수의 역할이 뭐라고 생각하냐?

 나는 주저 없이 원론적인 답변을 했다.

- 교육, 연구, 진료입니다.
- 그렇지?

 정재호는 준비한 듯 말을 풀었다. 이미 여러 사람들에게 설명한 듯 그의 말은 잘 정리되어 막힘이 없었다.

 

- 첫째로 교육에 대해서는 말이야. 1990년대 중반에 성형외과가 의사 국가고시 과목에서 독립 과목으로서는 제외됐어. 외과계 통합 과목 시험으로 출제되기 시작한 후로는 아무래도 의대생들에 대한 교육 집중도가 학부 차원에서는 많이 약해진 것 같아. 성형외과가 소위 인기 임상과목이라곤 하지만 의과대학에서 교수로서의 역할이 좀 그래. 둘째로 연구에 있어서도, 너도 잘 알겠지만 내가 '운드 힐링 프로세스(wound healing process, 상처치유기전)'나 성형 외과적 보형물에 대한 연구 등을 많이 진행했었는데, 여전히 큰 성과들이 많이 나오지 않고 있어. 우리 학교 여건도 한 원인이겠지만 무엇보다도 내가 한계에 부딪힌 것 같아. 세 번째로 진료 부분에 대해서는......

 

 정재호는 이 부분에서 약간 말을 쉬었다.

 

- 지금 성형외과는 말이야, 대학병원보다 오히려 개원가에서 더 앞서가는 부분이 많은 거 너도 잘 알고 있지? 밖에서 얼마나 치열하게 열심히들 하는지 아니? 그걸 보면 오히려 내가 대학에서 안주하면서 뒤처지고 있다고 느낄 때가 많아.

 정재호는 이미 뛰어난 외과 의사였다. 그의 수술 실력은 모든 외과계 교수들이 감탄하는 수준이었다. 그럼에도 익은 벼가 고개를 숙인다는 말처럼 정재호는 겸손했다. 또한 자신의 부족함을 두려움 없이 드러내 보였다. 그는 마지막으로 의과대학 교수로서의 책무를 들어 한 가지 이유를 덧붙였다.

- 그리고 이 모든 게 다 신통치 않더라도 기본적으로, 여기는 대학이기 이전에 한 조직이잖아? 나도 이제는 중견인데, 정작 내가 중견 책임자로서 이 조직을 잘 이끌어서 좋은 방향으로 만들어 간다는 자존감이라도 있으면 버틸 텐데 말이야. 혼자 힘으로는 어림도 없어. 그러니 말이다. 의과대학 교수라는 게 교육도 별로고 연구도 신통치 않으면서 진료역량도 충분히 발휘 못하고 있는데 조직을 잘 이끌어갈 동력조차 없다면, 이 조직에 내가 더 있을 필요가 있을까?

 정재호가 반문했으나 그 물음에 나는 답하지 못했다. 내 입에서 자조 섞인 말만 흘러나왔다.

- 그렇게 따지면 저부터 나가야죠. 저야말로 다 신통치 않은데다 그저 월급받기 위해서 다닐 뿐인데요. 생계형 교수죠......

 맥주를 들이켰다. 속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나는 정재호를 말리지 못할 것임을 알았다. 또 좋은 사람이 떠나가고 있었다.

 

 

 

3.

 

서울은 런던에 비해 도로가 넓고 큰 광장을 가졌으며 관공서와 학교도 많다. 헬리콥터가 이착륙하기에 런던보다 조건은 더 나아보였다. 그러므로 런던에서 HEMS가 날고 앉는 광경을 볼 때마다 서울 도심에는 착륙할 데가 없어 헬리콥터 운용이 적절하지 않다는 말이 나는 더 이해되지 않았다. 한국에서의 일을 떠올리면 수긍 할 수 없는 것이 태반이었다. 그 답 없는 황무지로 다시 끌려들어가는 것만 같아서 머리에서 솟아나는 의문들을 지워내려 애썼다.

 다른 것에 신경 쓰지 않고 주어진 일만 집중해서 했다. 환자를 보러 응급실에 내려갈 때마다, 중환자실에 갈 때마다, 병동 회진을 돌 때마다 사람들은 외상외과 의료진을 진심으로 반겼다. 할 일을 하고 그 자체로 인정받으며 내가 틀리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곳에서 나는 원흉도, 돌연변이도 아니었다. 제대로 된 시스템 속에서 일하면서, 한국에 다시 돌아가면 외상외과 일을 계속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시스템이 없는 곳에서 일하며 겪는 허무와 무의미를 더는 견뎌낼 수 없을 것 같았다.

 바쁜 일과 사이에도 틈은 생겼고 주말에는 병동 회식이 있곤 했다. 그럴 때면 동료들과 펍에서 맥주를 마시고 클럽에서 새벽까지 음악을 들었다. 세계적인 인디 밴드들이 모인다는 런던 중심가의 공연장들에서 시간을 보냈다.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면 직장에서 인정받고, 여유가 생기면 동료들과 편히 술 한잔 기울일 수 있었다. 내가 삶에서 바란 것은 그 정도였다. 앞으로도 이만큼만 살았으면 싶었다.

 그즈음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전쟁이 한창이었다. 전쟁 시에는 중증외상 환자가 발생하기 마련이므로 '블랙워터(BLACK WATER) USA'를 비롯한 사설 민간 군사 업체에서는 의무병을 선발했다. 그쪽으로 시선이 쏠렸다. 그것도 아니면 런던에서 다시 전공의부터 시작해볼까 고민했다. 어느 쪽이라도 좋았다. 그러나 무엇이든 새로 시작하기에 1년은 짧았다. 강물은 유예된 날들을 너무 빨리 끌어가버렸다.

 

 

 

4.

 

 나는 2002년 외상외과를 세부전공으로 시작한 이래 아주대학교병원이 중증외상특성화센터가 되기 전까지 혼자였다. 사람이 필요했으나 사람은 없었고, 나중에는 나 스스로 사람을 들이지 않았다. 간혹 외과전문의를 마친 후 수련받고 싶다고 찾아오는 임상강사 지원자들이 있었으나 모두 거절했다. 새 구두를 신고 새 길에 접어드는 그들을 진창으로 잡아끌고 싶지 않았다. 삶의 보편성으로부터 먼 일상과 상식 밖의 시선까지 버텨야 하는 진흙탕에 뒹구는 것은 나 하나로 족했다. 나는 지원자들을 만나게 되더라도 다른 세부전공을 추천했다. 그러나 그 군의관은 뜻을 꺾지 않았다. 부대에 휴가를 내고 기어이 나를 찾아왔다. 바로 정경원이다.

 육군 보병사단의 대위라고 했다. 선한 인상에 눈빛이 맑았다. 내가 여태까지 살면서 보아온 어떤 사람과도 달랐다. 목소리는 크지 않아도 울림이 있어 그 음성이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정경원을 보면서 욕심이 동했다. 이런 사람과 같이 일하면 좋을 것 같았으나 그런 마음을 애써 눌렀다. 좋은 사람은 더 좋은 일을 해야 한다. 정경원에게 그간의 내 경험과 암흑 같은 미래에 대해 있는 그대로 말해주었다. 그는 조용히 들었다. 내가 두서없는 말들을 끝냈을 때 얼마간 침묵이 흘렀다. 묵묵히 듣고만 있던 그가 입을 열었다.

- 교수님, 저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어긋나지 않는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그거면 됩니다. 큰 욕심 없습니다.

 예상 밖의 말이었다. 나는 내 업을 부끄럽지 않게 하고 싶을 뿐 내가 하는 일에 '소명'이나 '사명'같은 단어를 대입해보지 않았다. 무엇보다 내게 월급을 주는 것은 신이 아니라 병원이다. 신의 존재는 나에게 멀었고 그리스도적인 삶이 외상외과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정경원의 말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의 곧은 심지는 충분히 느껴졌다. 그럴수록 그를 이 사지에 들이고 싶지 않았다. 거듭 설득했으나 그의 답은 하나였다.

- 저는 외상외과 수련을 마치고 난 뒤 직장에 대한 보장이나 윤택한 삶을 바라는 건 아닙니다. 어디에서든 사람을 살리는 외과의사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심도 있는 수련을 받기를 바랍니다.

 나는 말 없이 정경원을 보았다. 이런 사람이라면 이 수령을 함께 헤쳐 나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솟았다. 고민해보겠다고 하고 그를 부대로 돌려보냈다. 배가 좌초할 경우를 떠올렸다. 그를 이 배에 태웠다가 최악의 상황이 올 경우도 생각했다. 그의 앞날이 걱정이었다. 거듭된 숙고 끝에 조석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 조 교수님, 혹시 나중에 정 선생 거취가 불확실해지면 다른 길이 있을까요?
- 이 교수님께 수련 잘 받고 부산대로 돌아와주면 고마운 일일 겁니다. 걱정 마세요.

 부산대학교병원에 규모 있는 중증외상센터가 세워질 때가 되면 외상외과 의사들이 많이 필요할 것이고, 적어도 정경원 한 사람은 돌아갈 자리가 있을 것이다. 정경원이 나와 같이 일한다면 내가 미국과 런던에서 익힌 수술적 치료 방법과 경험들을 그에게 가르쳐줄 수 있다. 아주대학교병원에 외상외과가 없어진다고 해도 내가 배운 국제적인 수준의 외상외과가 한국에서는 정경원을 통해 부산대학교병원에서 이어질 수 있다. 학맥이 사라지지 않고 계승되는 것이다. 갈 곳 없이 휘몰아치던 마음이 가라앉았다. 나는 그가 육군에서 전역하면 받아들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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